저는 후배변호사들이 작성한 서면을 제출 전에 검토합니다. 보통 갓 자격을 취득한 변호사님들의 준비서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서면은 사실과 법리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놀랍도록 그 비중이 법리에 실려 있습니다. 의뢰인이 그토록 여러 번 말하며 강조하던 사실관계는 몇 줄로 압축되고 추상화되어 있습니다.
게으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실함의 흔적에 가깝습니다. 수험 생활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시험지 위의 사실관계는 출제를 위해 만들어진, 말 그대로 몇 줄짜리 추상적인 사실관계입니다. 주어진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으니, 남는 일은 맞는 법리를 찾아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그 절차를 성실하게 몸에 익힌 사람일수록, 실전의 서면에서도 무게중심이 법리로 갑니다.
그래서 그런 서면은 검토 끝에 돌려보냅니다. 매번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서 후배들에게 하는 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준비서면은 시험 답안지가 아닙니다. 가장 정답을 써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정답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의뢰인의 주장을 개진하는 일입니다. 의뢰인의 주장이 틀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장이 옳게 보이도록 방법을 찾는 것이고, 옳게 보이지 못한다면 덜 틀리게 보이도록 그 길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사실을 왜곡하라는 말도, 없는 말을 지어내라는 말도 아닙니다. 의뢰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실관계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개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대부분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래도 변호사가 법리에 맞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 반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법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뢰인이 주장하는 사실관계를 추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정형화한 다음, 그 결과론적인 사실관계가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법리에 딱 들어 맞지 않는다고 섣불리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몇 줄로 요약해 둔 사건개요와 법리를 대조한 것이지, 의뢰인의 사건과 법리를 대조한 것이 아닙니다.
수년간 필드에서 일해 보면 알게 됩니다. 세상살이의 분쟁에, 법정까지 올 정도의 분쟁에 그런 단순한 사실관계는 없습니다. 사실관계 하나하나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며, 그것을 정리하는 일이 중요하고 또 만만치 않습니다. 오히려 실전에서 작동하는 법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법리에 맞다'고 딱 잘라 인정할 만한 사실관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정답이 어딘가에 서 있고 우리가 그것을 찾아 써내는 구조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반문에 논리로 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물을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위임받아 소송업무를 진행하는지. 의뢰인이 법리에만 철저히 부합하는 서면이 제출되기를 희망할지, 다소 법리에 맞지 않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서면이 제출되기를 희망할지. 판단이 안 선다면, 우리 의뢰인의 입장에서 고민하고 결정합시다."
돌이켜보면 15년 전 저의 서면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그 반문을 나무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도 후배변호사의 서면을 검토하며 같은 것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이 서면은 정답을 쓰고 있는지, 의뢰인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는지.
덧붙임 — 위임과 변론주의
변호사와 의뢰인의 관계는 법적으로 위임입니다. 수임인인 변호사는 위임의 본지에 따라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위임사무를 처리할 의무를 집니다.
민사재판에서 판결의 기초가 되는 사실과 증거를 수집하여 제출하는 책임은 원칙적으로 당사자에게 있습니다(변론주의). 어떤 사실을 주장할 것인지는 당사자와 그 대리인의 몫이고, 그 주장이 법에 비추어 옳은지를 판단하는 일은 법관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