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이 사실상 법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며 주장을 정리해 달라고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심리가 충분히 진행된 사건에서, 그동안 형성된 심증과 증거에 따라 법리를 정리해 주면서 한쪽 대리인에게 그렇게 요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게 보면 쟁점을 정리하려는 것입니다. 주된 쟁점이 아닌 것까지 심리하고 판단하고 판결문에 이유를 적는 수고를 줄이려는 뜻도 있습니다. 정당한 소송지휘입니다.
다만 이런 속뜻도 포함할 때가 많습니다. 판단해볼만한 것들만 남기고 쓸데없는 주장은 이제 그만 철회하라.
그런데 가끔은 그 권유가 일방적인 심증으로 보이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후배변호사로부터 결재 요청이 올라온 서면이 있었습니다. 의뢰인의 주장을 끝까지 존중해서, 재판장의 명시적인 요청과 반대로 기존 주장을 유지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장을 늘리고 강화한 서면이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서면이 작성되게 된 배경에는 의뢰인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을 것입니다.
법정에서 판사와의 마찰이 상당히 예상되는 서면입니다.
저는 후배변호사의 그 주장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도 서면 제출을 허락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주장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해보시라.
저는 꽤나 잘 쓰인 서면을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 짧고, 법리로 무장되어 있고, 잘 쓰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의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의뢰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서면이었습니다.
그 서면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되돌려 보냈고, 이 서면은 과했는데 제출하도록 결재하였습니다.
결재의 기준은 서면이 얼마나 잘 쓰였는가가 아니라, 그 서면이 누구 편에 서 있는가입니다.
다음 기일에 재판장은 의아하다는 표정과 말투로, 심하면 불쾌감을 드러내며 지난 기일의 요청이 반영되지 않았음을 지적합니다.
그 자리에서 저희는 뒤로 숨지 않습니다. 왜 따를 수 없었는지 묵묵히 답변하고 설명합니다.
"재판장님께서 지난번 기일에 언급하시고 요청하셨던 내용들은 법리적으로나 그간 심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관계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이해가 되고 또 수긍이 되는 면이 많습니다. 다만 의뢰인 본인이 인식하는 법률관계나 사실관계가 그와 상당히 다른 면이 있고, 그 또한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결정적으로 저희 소송대리인은 최후의 순간에 언제나 의뢰인을 신뢰하고 존중하고 그에 터잡아 주장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부득이 재판장님 말씀하신 내용에 따르지 못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재판에 나가는 사람은 서면을 쓴 변호사일 때도 있고, 제가 나갈 때도 있고, 함께 나갈 때도 있습니다. 마찰을 예상하면서 보낸다는 것은 그 마찰을 함께 지겠다는 뜻입니다.
그 법정에 의뢰인은 없습니다. 있었다 해도 그 순간의 긴장을 알아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판사와 소송대리인 사이의 긴장만 있습니다.
판사와의 관계는 앞으로도 여러 번 남아 있습니다. 의뢰인과의 관계는 그분에게 한 번뿐입니다.
승패도 중요합니다. 다만 더 중요한 것은 의뢰인의 만족과, 후회 없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