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상대방으로 만난 대리인에게서 배울 때가 있습니다.
대단한 법리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는 사실 드뭅니다. 기억에 남는 상대들은 대부분 다른 것으로 남았습니다. 집요하고 적극적인 소송행위였습니다.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 쪽이 이미 인정한 사실인데도, 상대방 대리인이 그 사실에 대한 조회신청서를 제출합니다. 회신이 오면 정리해서 그 내용을 샅샅히 인용하여 주장을 이어갑니다. 상대방으로부터 적당한 인정을 받았으면 그냥 지나가도 되는 자리에서, 굳이 그 수고를 합니다.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당사자가 인정한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판사 역시 소송경제를 이유로 상대방이 인정한 사실에 대하여 굳이 추가입증까지 필요한지를 묻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신청서를 쓰고, 회신을 기다리고, 내용을 확인하는 일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수고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정에는 계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적당히 인정하고 넘어가려는 쪽에는 계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인정으로 드러날 것이 70이라면, 숨기고 싶은 것이 30쯤 있는 것입니다. 두루뭉술한 주장과 두루뭉술한 인정 속에서는 사실관계의 면면이 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적당한 인정은 드러나도 되는 70을 내주고, 숨기고 싶은 30을 지키는 거래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소송에서 어디까지 다투고 어디서 인정할지는 각자의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생각으로 입증을 계속하면, 그 30까지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원고가 피고의 불법행위를 주장하는 사건에서, 피고가 그것을 대충 인정하고 넘어가려 할 때가 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구체적인 추가입증을 이어가면, 불법행위의 면면이 낱낱이, 생생히 그리고 더욱 객관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처음 원고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중대한 불법성이 드러나는 상황도 있습니다.
캐기 전에는 그 30이 얼마나 큰지, 캐는 쪽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수고를 합니다
인정을 받았다고 입증을 멈추지 않는 것. 저는 이것을 책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소송상대방으로 만난 대리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며 배웠습니다.
그 상대를 만난 재판은 힘듭니다. 우리가 인정한 자리까지 파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은 상대를 만난 재판은 지는 날에도 남는 것이 있습니다. 15년의 법정에서 저를 가르친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상대방 자리에 앉아 있던 변호사들이 있습니다.
덧붙임 — 인정된 사실과 증명
민사소송법 제288조는 법원에서 당사자가 자백한 사실과 현저한 사실은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아니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불요증사실). 다만 진실에 어긋나는 자백은 착오로 말미암은 것임을 증명한 때에 취소할 수 있습니다. 자백의 대상이 되지 않은 구체적 사실관계의 면면은 여전히 증명의 대상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