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을 돌려보내면 반론이 돌아옵니다.
"이런 건 재판에서 안 먹힙니다."
"이걸 다 쓰면 우리 주장의 신뢰가 오히려 떨어집니다."
"재판부에서 우리 법무법인을 어떻게 볼지 우려됩니다."
세 문장은 서로 다른 말처럼 들립니다. 하나는 실효성이고, 하나는 전략이고, 하나는 평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셋이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걱정
이 서면을 들고 법정에 나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변호사입니다. 그가 직접 출정해서, 판사 앞에 앉아, 이 서면으로 재판을 수행해야 합니다. 재판부가 이 서면을 어떻게 읽을지를 그 자리에서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 세 문장은 표현이 다를 뿐입니다. 안 먹힌다, 신뢰가 떨어진다, 우리를 어떻게 볼지 우려된다 — 전부 "이런 서면을 들고 내가 판사 앞에 서야 한다"는 한 문장의 세 가지 번역입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진짜입니다. 저는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서 봤습니다.
다만 그 걱정의 주어가 누구인지는 짚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시하지 않고 되묻습니다.
"지금 그 우려는, 재판에 출정하여 판사를 맞닥뜨려야 할 우리 변호사를 위한 우려입니까. 아니면 진짜 의뢰인을 위한 걱정입니까."
이 질문이 고약한 이유는, 세 문장이 모두 법률적 판단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부 그럴듯합니다. 그래서 논리로는 반박할 수 없습니다. 반박이 아니라 주어를 물어야 합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정말 빼는 것이 나은 경우가 있습니다.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경험으로 그것은 백 건 중 한두 건입니다.
나머지 아흔여덟, 아흔아홉은 무엇인가. 그것은 변호사의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대개 판사의 관점에서 내린 변호사의 판단입니다.
우리는 법을 배울 때 판단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래서 서면을 쓸 때도 자기 어깨너머에 판사를 앉혀 둡니다. '이건 판사가 안 좋아할 텐데.' '이건 구차해 보일 텐데.'
그런데 그 판사는 실재하는 판사가 아닙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우리가 상상한 판사입니다. 우리는 그 상상 앞에서 의뢰인의 사실관계를 미리 덜어냅니다.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서면에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논의가 정말로 불리한 사실관계를 두고 벌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 대화는 대개 불리해서가 아니라, 구차해 보여서 시작됩니다.
불리한 것과 구차한 것은 다릅니다. 불리한 것은 법률적 판단의 문제이고, 구차한 것은 우리 체면의 문제입니다.
누가 그 비용을 치르는가
사실관계를 덜어내면 서면은 깔끔해집니다. 법정에 들고 나가기에도 편합니다. 그 이득은 우리에게 옵니다.
그리고 그 비용은 의뢰인이 냅니다. 자기 이야기가 빠진 서면을 받아 드는 방식으로. 자기 사건이 어디까지 다뤄졌는지 영영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서면이 길어지는 부담과, 그것을 들고 법정에 서는 부담은 우리가 집니다. 그 안에 자기 사건이 들어 있는 문서는 의뢰인이 가져갑니다.
편한 쪽을 우리가 갖지 않는 것. 그것뿐입니다.
법관 앞에 놓이지 않은 사실은 심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리 지운 사실은, 재판에서 진 것도 아니고 이긴 것도 아닙니다. 다뤄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결과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돌려보낸 서면이 두꺼워져 돌아오면, 저는 그것을 한 번 더 읽습니다.
거기 적힌 사실관계가 재판부의 마음을 움직일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다만 그 서면은 이제, 판사가 어떻게 볼지를 걱정하며 쓴 문서가 아니라 의뢰인의 사건을 적은 문서입니다. 그 차이는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