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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칼럼

우리는 판사가 아니고 법원이 아닙니다

형사·성범죄 배철욱 대표변호사 · 2026-08-10 17:30

좋은 변호사는 판례를 잘 아는 변호사라고들 합니다.

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수험 시절 내내 판례를 외웠고, 지금도 사건을 맡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판례를 찾는 일입니다. 그것이 변호사의 실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년 시절, 저는 상담실에서 판례를 꺼내 들었습니다.

"대법원 판례상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이 문장을 말할 때 저는 제가 유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분도 대개 납득하셨습니다. 판례라는 말 앞에서 사람들은 조용해집니다. 상담은 짧게 끝났고, 저는 정확한 정보를 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 선배 변호사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판사가 아니다"

"우리는 판사가 아니고, 법원이 아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판례를 중요하게 공부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할 일은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고 그 가능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기회를 갖는 것이지, 법원의 입장에서 그 가능성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꺾는 역할이 아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상담실에서 하던 일이 무엇이었는지가 그제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의 사건을 먼저 판결하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아직 아무것도 보지 않은 사건을, 판사가 하기도 전에, 제가 대신 기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판례를 근거로. 즉 가장 유능해 보이는 방식으로.

판례를 공부하는 이유

판례는 지나간 사건들의 결론입니다. 지나간 사건과 지금 이 사건이 같다면, 판례는 답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은 없습니다.

사건을 뭉뚱그리면 판례에 걸립니다. 뭉뚱그리지 않고 세세히 따지면, 다른 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른 점 하나가 결론을 바꿉니다. 재판하는 판사도 매번 다른 사람입니다.

변호사가 판례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 다른 점을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의뢰인의 말을 꺾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같은 지식이 정반대의 두 가지 일에 쓰입니다. 재단하는 데 쓰이거나, 발견하는 데 쓰이거나.

그러니 변호사가 판례를 근거로 의뢰인의 말을 꺾을 때, 그는 유능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리를 떠나 법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희망을 팔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안 되는 사건을 된다고 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승산이 낮은 사건을 들고 오신 분 앞에서,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기존 판례를 뭉뚱그려 해석해 결론을 내린다면 통상 어렵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건은 세세히 따져보면 다 다르고, 결론도 다르게 나올 가능성이 있고, 판결하는 판사도 매번 다릅니다. 쉽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열심히 다퉈볼 만한 사건입니다."

이 말에는 승산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다투겠다는 태도뿐입니다.

저는 결과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증거가 정하고, 증거는 변호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건에 다퉈볼 것이 남아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판단할 수 있고, 남아 있다면 그것을 법원 앞에 가져가는 일까지가 제 일입니다.

거기까지가 제 자리입니다. 그 뒤부터는 제 자리가 아닙니다.

저는 이 말을 지금 젊은 변호사들에게 합니다

우리 사무실의 젊은 변호사들도 상담실에서 판례를 꺼내 듭니다. 저는 그것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판례를 열심히 공부한 사람만이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때 저는 십몇 년 전에 제가 들었던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우리는 판사가 아니라고.

그 문장은 제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물려받았고, 지금도 매번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직 제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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